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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제주도 감물염색 갈굴중이 재발견과 히잡
등록날짜 [ 2023년02월20일 12시57분 ]
[패션저널&텍스타일라이프:허북구 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 국장]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신윤복(申潤福)의 풍속도화첩에는 월하정인(月下情人)이라는 그림이 있다. 
 
그림은 초승달이 비치는 깊은 밤중에 등불을 든 선비 차림의 젊은이와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을 묘사한 것이다. 
 
그림 속의 여인이 쓴 쓰개치마는 조선 중기 이후 양반층 부녀자가 바깥출입을 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한 쓰개이다.

형태는 보통 치마와 같은 것으로 끈이 달려 있다. 주름을 겹쳐 잡고 치마허리는 얼굴 둘레를 감싸 턱 밑에서 맞물려질 정도의 길이로 양 뺨을 감싸 턱밑에서 마주 잡게 되어 있다.
 
우리나라 쓰개처럼 얼굴은 가리는 문화는 서양에서도 있었다. 서양에서는 베일링(veiling)을 사용했다. 베일(veil)은 여성들이 머리와 얼굴을 가리거나 보호 또는 장식하기 위하여 쓰는 천으로 수녀, 무슬림 여성의 히잡 등 종교상의 이유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그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베일을 쓴 여사제를 묘사한 조각상은 기원전 2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비잔틴, 그리스, 페르시아 제국의 엘리트 여성들은 존경과 높은 지위의 표시로 베일을 썼다. 여성 노예와 매춘부가 베일을 쓰면 가혹한 처벌을 받았으므로 베일은 신분의 구별 역할도 했다. 
 
베일은 고대 그리스에서도 관례였다. 기원전 550년에서 323년 사이에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존경받는 여성들은 은둔하고 낯선 남자의 눈에서 자신을 가릴 수 있는 옷을 입어야 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베일을 사용해야 했다(고린도전서 11장 4-7절).
 
이슬람교에서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가 610년 아라비아반도 메카 근교에서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부터 632년 죽을 때까지 집대성한 이슬람교 경전인 코란(Koran) 구절에 히잡(Hijab)관 관련된 내용이 있다.
 
히잡은 이슬람의 여성들이 머리와 상반신을 가리기 위해서 쓰는 쓰개이다. 아랍어로 ‘가리다’는 의미를 가진 이슬람 여성 전통 복장으로, 얼굴만 내놓은 채 머리에서 가슴 부위까지 천을 늘어뜨려 가린다.
 
코란 구절에는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옷을 입고 걷는 방식과 관련해서 히잡보다는 키마르(Khimar, 상체를 덮는 머리 수건)와 질밥(jilbab, 머리와 손을 제외한 모든 신체를 가리는 길고 품이 넓은 옷이나 코트)라는 것에 가까운 용어가 나와 있다.

이 구절의 적용에 대해 무슬림 학자들 간에는 이견이 있으며, 일부 이슬람국가에서는 코란에 근거해서 여성의 히잡 착용을 법적으로 규정해 놓고 있다.
 
현재, 히잡 착용이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대표적인 나라는 이란이다. 이란은 1936년 모든 종류의 베일 사용을 금지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1979년 이슬람 혁명이 일어났고, 여성에게 이슬람 복장을 의무화했다. 1983년 형법은 히잡을 착용하지 않고 공공장소에 나타난 여성에 대해 74회의 태형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란은 지난해 9월 이른바 ‘히잡 의문사’로 반정부 시위가 촉발되었고, 지금은 시위가 다소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으나 히잡을 벗었던 유명 여성 인사들은 여전히 불안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란의 히잡은 복식문화가 사회적 관습, 종교적 규범 등을 쉽게 뛰어넘기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히잡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복식 문화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치마를 벗고 바지를 입기까지의 과정은 쉽지가 않았음은 제주도의 갈굴중이에 나타나 있다. 
 
일본인 이즈미 세이치(泉靖一)가 1930년대 제주 모습을 기록한 책 『제주도(濟州島)』에는 조천면 함덕리에서 동쪽 해촌까지의 여자들이 갈굴중이를 입고 다녀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도 그걸 것이 제주도에서 굴중이는 치마 속에 입는 바지로 일종의 속옷으로 당시에는 외출 시 치마를 입어야 하는 것이 사회적 관습이었다. 그런데 밭일이나 집안일 할 때 치마는 불편했으므로  치마를 벗어 놓곤 했다.

그것이 잦아들면서 감물로 굴중이를 염색한 다음 일할 때 입거나 함덕리에서 동쪽 해촌 여자들이 입고 다녔던 것처럼 외출복에 이용된 것이 갈굴중이었다. 
 
굴중이에 대한 감물염색은 시각과 인식부터 속옷과 구별되게 하고, 겉옷으로 사용할 수 있는 명분제공과 함께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 문화를 만들어 냈다.

이것은 감물염색이 패션과 결부되어 사회적 관습에 저항 및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허북구. 2022. 미래를 바꾸는 천연염색. 중앙생활사).
 
갈굴중이는 이처럼 상징성이 강하고, 현대적으로도 응용 가능성이 많은 형태를 갖추고 있으므로 재발견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제주도에는 갈옷 개발과 현대화 등을 부르짖고 있으나 갈굴중이라는 보물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치마에서 바지로의 전환 촉매제가 된 갈굴중이의 역사적 의미와 상징성 그리고 패션 디자인의 가능성을 재발견하고 살려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제주의 패션 자산으로 삼길 바란다. 
 
(패션저널&텍스타일라이프 ⓒ okfash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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