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저널&텍스타일라이프:허북구 나주시천연염색문화재단 국장]“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낫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이웃의 즐거운 일에는 같이 기뻐하고, 어려운 일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데서 유래한 속담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는 그렇다. 그 정서에서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이웃은 그런 것인데, 이웃 나라 일본은 이웃 국에게 수없이 망나니짓을 해왔다. 세월이 흘러도 변할 줄을 모르고 있다. 이젠 뻔뻔스러운데다가 졸부 짓 꺼리 까지 하고 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유난히도 주변 국가들을 괴롭혔던 나라들이 있다. 대부분 통치자의 빗나간 야심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도덕적 선진국에서는 그 빚을 후세들이 참회하면서 갚아 나가고 있다. 일본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참회는커녕 지속적으로 역사 왜곡에 나서고 있다.
일본의 후세대들은 그 빚을 어떻게 갚을지 걱정이 되면서도 우리는 우리대로 반일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게다가 무역전쟁으로 예기치 않게 피해를 보는 양국의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다.
인도네시아 바틱(Batik)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바틱은 천연 밀랍을 방염제로 사용하는 왁스(wax)의 저항력을 이용한 납염 방법이다. 그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인도네시아 유래 설에 비중이 실려 있다. 바틱 기술이 정점에 달해 있고, 세계적으로 알린 곳도 인도네시아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그 만큼 바틱을 문화적 자부심으로 삼고 있는데, 1970년대부터 이웃 나라인 말레이시아에서 자국의 문화라고 주장을 했다. 급기야 2005년 12월 5일부터 6일까지 자카르타 아세안 사무국에서 개최된 제1회 아세안 전통 텍스타일 심포지엄에서 말레이시아 발표자는 ‘바틱이 말레이시아의 전통의상이며, 말레이(Malay)족의 문화유산이다’라고 소유권 주장을 했다.
행사가 끝난 뒤 인도네시아는 발칵 뒤집혔다. 인도네시아인들의 반말레이시아에 대한 감정이 고조됐다. 인도네시아 신문에는 말레이시아를 맹렬히 비난하는 사설이 쇄도했다. 성난 인도네시아인들은 말레이시아를 도둑이라고 했다. 일부 자격단원들은 말레이시아와 전쟁을 치르겠다고 주장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의 반말레이시아에 대한 감정 고조는 바틱의 소유권 주장이 도화선이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 경제, 문화, 역사가 얽혀있었다. 과거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두 나라를 형님 동생의 관계로 생각했지만 말레이시아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그 나라에서 일하게 된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영토분쟁, 여러 가지 인도네시아 문화에 대한 말레이시아의 문화소유권에 대한 갈등이 내재되어 있었다(이지혁. 2014. 박사학위논문).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인도네시아 정부에서는 바틱을 대외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문화적 구심적으로 삼았다. 내부적으로는 다양한 종족을 결합시키는 매개체로 활용하면서 바틱을 교복, 공무원복, 바틱 입는 날 제정 등 정책적으로 지원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바틱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인도네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바틱 의상은 옛날 옷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정책적 지원에 비해 산업화도 속도감을 내지 못했다.
그랬던 것이 말레이시아와 바틱 분쟁이 일어나면서 크게 변했다. 우선 젊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바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바틱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소비가 증가하자 산업체도 활기를 띄었다. 정책도 이를 뒷받침했다. 바틱을 유네스코에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신청해 2009년에 인도네시아 바틱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산업적으로도 크게 성장해 약 100만명이 바틱 관련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4,800여개의 공장에서 관련 상품이 생산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바틱이 말레이시아와 소유권 분쟁을 겪으면서 도약의 길을 걸었듯이 우리도 힘을 모아 한일간 무역전쟁을 섬유패션산업의 체질 개선과 큰 발전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패션저널&텍스타일라이프 ⓒ www.okfashi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