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저널&텍스타일라이프:원유진 취재부장] 한일 간 외교적 마찰까지 불러온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 갈등이 좀처럼 봉합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1주년을 맞아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은 부산 동구청이 불법 조형물이라는 이유로 철거를 강행해 논란이 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전국적인 비난이 들끓자 동구청은 소녀상 설치를 묵인하고 보호에도 나서겠다고 물러섰다. 하지만 이후 일본 정부가 대사와 부산 주재 총영사를 본국으로 소환하며 강하게 반발하는 등 외교적 마찰까지 이어진 상황이다.
첨예한 공방과는 대조적으로 소녀상은 시민들이 만들어준 목도리며 귀마개, 양말 등을 걸치곤 행복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화려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불과 1미터 남짓의 소녀상. 이 작은 조형물은 전 국민적인 분노와 연민, 호기심 등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필자는 생뚱맞게도 위안부 소녀상을 보며 ‘가을 전어’를 떠올렸다.
전어는 20년 전만 해도 가장 천대받는 생선이었다. 포장마차에서도 꼼장어를 주문하면 공짜로 서너 마리 구워 줄 정도로 값도 싸고, 인기 없는 메뉴였다. 그런 전어가 가을을 대표하는 생선으로 우뚝 선 것은 불과 10여년 전이다. 전어의 맛은 달라진 게 없지만, 사람들은 뭔가에 홀린 듯 전어에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즐겨 먹었던 양 가을만 되면 전어를 찾아대기 시작했다.
이는 순전히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스토리텔링의 힘이었다. 마당에서 전어를 굽고 있는 시어머니, 그리고 싸리문 밖에서 봇짐들고 군침을 삼키는 집나간 며느리. 이 이미지가 사람들 머릿속에 들어가면서 ‘전어가 그렇게 맛있는 생선이야’ 라고 다시 생각하게 됐고, 자기 입맛을 의심하게 되면서 전어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소녀상과 전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일까.
물질과 비물질의 차이는 있지만, 이 둘은 모두 ‘구체성’이라는 힘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소녀상의 이미지만 봐도 일제 강점기의 비참한 현실과 일본의 만행을 떠올린다. 가을 전어는 매운 시집살이보다 매력적인 맛이 혀끝에 맴돌게 만든다.
소녀상은 스토리를 상징화 했고, 전어는 대상을 스토리화 했지만, 두 사례 모두 이야기로 전달되는 순간 머릿속에 스냅사진 같은 이미지를 ‘쾅’ 박아 놓았다. 메시지가 얼마나 구체적이냐 혹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냐에 따라 전달력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어제 밤 12시경 청주 모 사거리에서 귀가 중이던 30대 남성 김 모 씨가 뺑소니 차량에 치여 숨지는….’ 이와 같이 정형화된 레토릭은 듣는 이로 하여금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이미지가 전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축구장 25개 면적인 18헥타르’처럼 기사문에서 낯선 수치를 친숙한 이미지로 치환해 구체화 시키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국내 패션업계에서도 상징과 스토리텔링은 자주 활용되는 마케팅 도구다. 하지만 제대로 효과를 거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스토리를 담지 않은 상징은 금새 잊히기 마련이고, 낮선 전문용어와 현란한 미사여구의 향연인 스토리는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샤넬 넘버5를 입고 잠드는 마릴린 먼로. ‘필요하지 않다면 이 재킷을 사지 마라!(Don't buy this jacket unless you need it!)’ 카피로 친환경 이미지를 각인 시킨 파타고니아. 패션업계의 대표적인 상징과 스토리텔링을 활용한 마케팅 성공 사례다.
현재 국내 패션업계는 장기불황과 해외 브랜드 진입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스스로 위기를 돌파하고 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힘은 결국 ‘브랜딩’이다. 스스로 가치를 높이고 고객의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도 드라마를 만드는 스토리텔링과 스토리에 힘을 불어 넣는 상징은 다윗이 골리앗과 맞설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국민은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감성적이고 동조적인 성향의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춘하시즌을 앞둔 지금, 소녀상과 가을전어는 패션마케터라면 한 번쯤 되새겨봄직한 화두임에 틀림없다. (패션저널&텍스타일라이프 ⓒ www.okfashio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