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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2007 북한 개성공단을 가다
개성공단-낙후된 북한 경제 개선 통일 디딤돌, 신원 에벤에셀 의류봉제공장-북 근로자에 신뢰구축 대등한 동반자 인식 심어
등록날짜 [ 2007년08월10일 00시00분 ]

이 르포는 본사 조영준 발행인이 지난 6월 26일 개성공단내 신원 에벤에셀 공장과 개성시 관광지인 선죽교, 고려민속박물관 등을 둘러보면서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본지는 창간 10주년 특집호에 이 르포를 게재한다.(편집자주)


신원 개성공단 방문단이 개성공단에 들어가기로 한 날짜는 5월 23일이였다. 경의선과 동해선이 개통되기 전 개성공단을 방문하는 스케줄이였다. 개성공단 만이 아니라 개성시내를 통과해 선죽교와 고려민속박물관을 관람하는 일정이였다.

신원측은 2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개성시내를 통과해 관광지를 돌아 볼 수 있도록 북한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낼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러나 북측은 몇차례 허가를 유보하다 남북 철도 개통 행사가 끝나고 장마철로 접어드는 시기에 신원 방문단의 개성 출입을 허가했다. 일정이 변경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신원은 이번에도 대규모 인원의 개성공단 방문 및 개성시내 관광지 방문 허가를 받아 냈다.

이것은 국내 최초로 개성공단에 입주한 신원의 능력-즉 신원 박성철 회장의 대북사업 애착과 열정이 낳은 결과물이였다.

북한 방문은 하루 전날까지 예측을 불허했다.신원은 북측으로부터 허가가 나왔지만 당일 어떻게 될 지 예상할 수 없다며 취소 될 수도 있다는 단서를 먼저 달았다. 북한 방문은 여전히 예측 불허의 스케줄 속에서 이루어졌다.

장마철로 접어 들어 비가 내릴 것으로 예상했지만 날씨는 맑았다. 신원 박성철 회장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날씨가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패션기업인 신원의 개성공단 진출은 남북 화해와 분단의 벽을 넘기 위한 큰 걸음이였다.

그 걸음이 계기가 돼 지금까지 타업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섬유패션업계 종사자들이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번에도 2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개성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때를 맞춰 북한 영변의 핵사찰을 위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실무 대표단도 평양으로 들어간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북한을 둘러싼 핵문제가 실마리를 찾을 경우 개성공단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의 앞날도 밝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원 개성공단 방문단은 6월 26일 오전 6시50분 마포구 공덕동 소재 신원 본사 건물에 집결했다. 신원은 기독교 회사의 이미지를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들어내 놓는다. 신원 본사 옥외 광고판에는 [주일은 쉽니다]라는 문구가 365일 걸려 있을 정도다. 패션제품 광고에도 신원은 기독교 회사의 냄새를 지우지 않는다.

이날도 어김없이 1층 예배당에서 출발 미사가 있었다.이번 방문단은 종교계 인사들이 많았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목사들이 대거 참가했다. 종교계 외에도 언론사, 금융권, 증권가 애널리스트, 거래선(백화점 바이어),대학교수 등이 이번 방문단의 일원이였다. 예배가 끝난 뒤 박성철 신원 회장은 개성공단 방문 배경과 그동안 개성공장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고통과 어려움 등을 토로했다.

박 회장은 "개성공단에서 생산되는 의류 제품은 신원 전체 의류제품 생산량 가운데 아주 낮은 비중을 점하고 있다"며"개성공단 매출은 신원 전체 매출 중 2005년 2.5%,2006년 3.9%를 점유했고 2.3공장이 완공되는 2007년에는 13%의 생산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개성공장 운영으로 인해 대북 관계가 악화될 때 마다 주식이 요동치는 등 마치 신원 전체가 대북사업에 의존하고 있는 듯한 오해를 불러왔다"며 "신원 개성공장은 수출용이 아닌 내수용으로 전량 국내에 판매되기 때문에 대북 문제나 FTA 협상의 원산지 문제에 영향 받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는 "그동안 정치적으로 대북 관계가 악화될 때 마다 개성공단이 도마 위에 올라 이리저리 휘둘렸지만 실제 개성공단은 한반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고 강조했다.

출발전 박 회장의 연설은 10여분간 이어졌다. 주요내용은 개성공단과 관련해 신원이 겪어야 했던 고충들이 많았다.

그러나 출발전 그의 연설은 개성공단 운영에 대한 강한 확신과 신념, 자신감 등이 담겨 있었다. 특히 그는 신앙(기독교)을 바탕으로 한 대북사업에 강한 집념을 나타냈다. 그의 연설에는 [하나님 축복으로 해낼 수 있었다]는 표현이 수차례 반복됐다.

버스 5대에 나눠 탐승한 방문단은 7시30분경 신원 본사를 떠나 불과 1시간도 안돼 도라산 CIQ에 도착했다. 버스는 출근 시간 전이라 막힘없이 한강을 끼고 자유로를 정상 속도로 달렸다.

차안에서 비디오 교육이 실시됐다. 북한에 대한 교육은 대부분 금지사항 일색이였다.신원 직원들로 구성된 안내원들도 북한 땅에서 하지 말아야 할 사항을 거듭해서 주지시켰다.가장 강조되는 부분은 북한 근로자에 대해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를 하지 말 것,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나 김일성, 김정일 사진을 향해 손가락질 하지 말것 등이였다. 신원이 준비한 아침 도시락을 비우는 사이 버스는 일산, 문산을 지나 도라산 CIQ에 닿았다. 도라산 CIQ에서 수속 절차를 밟았다.

1년 전에 비해 훨씬 간편하게 수속이 진행됐다. 그때 보다 더 많은 인원이 개성공단을 방문하지만 CIQ에서의 수속과 비무장지대 통과 과정이 훨씬 짧고 간단해 졌다고 느꼈다.확실히 1년 전과 많이 달라진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지됐다.

최근 화제가 됐던 북한을 둘러싸고 일어난 대내외적인 사건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6자회담, 한-미 FTA 협상, 남북 철도(경의선,동해선) 연결, BDA 문제 해결 등등..이런 굵직한 사건들 외에도 개성공단 내부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건 사고들이 있었고 이런 진통과 아픔 속에서 개성공단도 변화된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1년 전에 비해 북측 CIQ는 현대식 건물에 들어서 있었다.당시 안내원은 우리측에서 현대식 CIQ를 지어 주었지만 북측이 전력난을 이유로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남한에서 전력을 공급받아 북한 개성공단의 전력 사정이 다소 개선됐다고 했다.

북측 CIQ에서 입국 절차를 마치고 다시 버스를 타고 개성공단으로 들어갔다.공단 입구는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창이였다.새로 입주한 업체들로 인해 공단 건물들이 1년 전 보다 훨씬 많아 보였다.

(주)좋은사람들 등 섬유패션업체들이 추가로 입주해 있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이 건설중인 아파트형 공장도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대아산이 계획한 대로 공단 조성이 진행될 경우 개성공단은 2천만평에 달하는 부지 위에 공장이 세워지고 북측 근로자 10만명이 근무하게 된다. 공장만 들어서는 게 아니다. 공단 운영에 필요한 각종 재반시설들도 들어서게 된다.

골프장도 3개 정도가 계획 돼 있다. 골프장이 완공되면 개성시내 유명관광지와 골프투어를 연결한 관광 상품도 등장 할 것이라고 했다.공단은 여기저기서 건설 공사가 한참 진행중이였다. 개성공단 주변에 위치한 산들은 여름철이라 나뭇잎이 무성해 보였지만 여전히 민둥산이 많았다. 남측의 나무심기 행사로 인해 나무가 많이 심어 졌지만 아직 남쪽의 산처럼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신원 공장에 들어서자 북측 여성 안내원이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문 입구에서 방문단을 반겼다. 방문단은 곧장 3층 신원 에벤에셀 교회로 들어갔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 땅에 신원이 세운 교회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십자가 반입 사건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그동안 끊임없이 회자 됐었다.

박성철 회장은 신원 에벤에셀 교회의 설립 과정을 설명하며 그간의 어려움과 고충을 토로했다. 신원이 개성공단에 교회를 세우기까지 치뤄야 했던 험난한 경로를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종교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북한 땅에서 대형 십자가를 걸고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볼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은 북한 땅에 공장을 세워 옷을 만들어 내는 것 못지 않게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이다.

박 회장은 이런 변화를 이끌어 내기까지 숫한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다며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돌렸다. 

신원 개성공단 방문단이 개성공단에 들어가기로 한 날짜는 5월 23일이였다.경의선과 동해선이 개통되기 전 개성공단을 방문하는 스케줄이였다. 개성공단 만이 아니라 개성시내를 통과해 선죽교와 고려민속박물관을 관람하는 일정이였다. 신원측은 2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개성시내를 통과해 관광지를 돌아 볼 수 있도록 북한 당국으로부터 허가를 받아낼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북측 근로자 근면,성실,책임감 강해 신원 공장 흑자 경영

이렇게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역할을 기업인들이 하고 있다. 기업인이 아니면 감히 해내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분단에 장막을 넘었듯이 지금도 개성공단에 진출한 우리 기업들이 뒤를 이어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예배가 끝나고 신원 공장의 의류 생산라인을 둘러 보았다.

황색 라인을 따라 방문객들이 움직였다.북한 근로자들은 방문객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작업에 몰입해 있었다.여기저기서 카메라로 자신들의 일하는 모습을 찍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박성철 회장은 북측의 근로자들이 근면, 성실하고 책임감도 탁월해 당초 예상했던 것 보다 빨리 기술과 기능을 익혔다고 말했다. 처음 신원 에벤에셀 개성공장이 설립 됐을 당시 숙련공 양성을 위해 중국 대련에서 봉제 기술자 20여명을 데려와 기술을 익히도록 했으며 북측 근로자들을 대련에 보내 실습도 시켰다고 했다.

박 회장은 북측 근로자들의 출근 시간에 남측 관리자들이 회사 문앞에 나와 인사를 주고 받는 등 인간적인 유대감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우리기업들이 해외에 나가 공장을 설립 운영하면서 부딪치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현지 근로자들과의 인간적인 유대감 부족이였다.

동남아, 남미 등 해외에서는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가 많이 달라 어쩔 수 없이 부딪치는 문제였지만 개성공단에서는 말이 통하고 문화가 거의 같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한다면 분단으로 인한 이질감도 쉽게 극복될 수 있다고 했다.

개성공단에서 우리 기업들이 북측 근로자를 고용하려면 북한의 문화와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박 회장은 북측 근로자들이 우리 보다 경제적으로 윤택하지 않다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남측 관리자들에게 늘 강조한다고 말했다.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예요. 우리가 도와 준다고 의시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필자는 박회장의 공장 운영방침을 들으면서 북측이 왜 신원 공장에 교회 설립을 허가해 주었는지 어느정도 알 것 같았다. 박 회장의 말처럼 신원이 북한측과 인간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 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신원은 그같은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이곳에서 처음으로 패션쇼를 열었다.남한의 인기 연예인 김태희가 모델로 나와 패션쇼를 열었던 것이 2005년 5월이였다.

그후 신원은 개성공장 기업투자설명회 및 개성공단 제2공장 착공식(2006,2,9)을 비롯해 개성공단 주재원 가족 방문 행사(2006,11,23), 기독교계 지도자 방문 행사(2006,11,30),개성공장 기업설명회 및 개성공단 제2,3공장 준공식 (2007,2,8)등 굵직한 대규모 행사를 잇따라 차질없이 진행했다. 이런 대규모 행사를 진행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신뢰 구축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졌다.

신원 에벤에셀 공장에 현재 북측 근로자는 320명에 달한다. 이들은 모두 개성시내에서 출퇴근 한다. 올 연말경 완공을 앞두고 있는 제2,3공장이 완공되면 북측 근로자 520여명이 더 확충된다.  1·2·3공장을 합칠 경우 북측 근로자는 850~900여명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남측주재원은 10명이 상주하게 된다. 2층에는 대규모 구내식당과 샤워실, 탁구장, 관리원 사무실, 남측 기숙사 등이 갖춰져 있었다. 구내식당의 메뉴판에는 1주일간 식단 메뉴가 쓰여져 있었다.

신원 관계자는 "북측 근로자들이 매주 1번씩 쇠고기국을 먹을 수 있도록 적극 배려 한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상류층이 아니고는 쇠고기국을 자주 먹기 힘들다며 개성공단 근로자들은 그래도 북측에서 선택받은 사람 가운데 속한다고 덧붙였다.


박성철 신원 회장 신앙 바탕 신뢰 구축 ,대규모 예배당 세워

공장 내부를 돌아 보면서 북측 근로자들의 인상이 1년 전에 비해 더욱 밝아졌다는 느낌을 받았다.교회에서 예배를 본 뒤 공장을 둘러 보고 있는 사이 방문단의 개성시내 안내와 통제를 위해 평양에서 북측 공무원 8명이 내려왔다.

평양에 있는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이라는 기관에서 나온 공무원들이였다. 그들은 대부분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대 등을 나온 엘리트들로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들과 달리 표준말과 함께 남한 방문단에 접근해 자연스럽게 얘기를 나누곤 했다.

나는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의 책임참사와 얘기를 나누었고 기념 사진도 같이 찍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왔으며 1967년 생이라고 했다. 말투에는 북한 사투리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원 홍보실 최진우 부장은 "개성공단과 관련된 대북사업의 모든 사안이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이 관할하며 그들의 판단에 따라 모든 사안이 진행된다"고 말했다.

최 부장은 북측 책임참사와 평양에서 만나 뒤 다시 재회 했다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공무원들이 5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현대아산으로 방문단을 안내했다.

현대아산은 개성공단 프로젝트를 총괄 관리 지휘하는 남한측 대표 회사다.북한은 현대아산에 50년간 개성공단의 부지 활용에 대한 독점권을 주었다.

개성공단 입주업체들이나 입주 희망업체들은 현대아산이 책정한 부지 임대료가 너무 비싸다는 불평을 쏟아내고 있지만 현대아산은 그들나름대로의 주장과 입장이 있는듯 했다.

현대아산의 개성공단 프로젝트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업종은 역시 섬유패션업종이다. 앞으로 200만평의 부지에 공장이 세워지게 되는데 그 주역은 섬유패션품목이 될 수 밖에 없다.

섬유패션산업 가운데 노동집약적 품목인 봉제 분야가 상당부분을 점하게 될 것이다. 전자나, 반도체, 중공업 같은 품목은 개성공단 진출에 한계가 따르기 때문이다. 북한이 적성 국가에서 해제 되지 않는 한 기술집약적인 품목이나 국가방위산업과 관련된 품목, 미국 등이 기술유출을 우려해 기자재의 대외 이전을 금지한 업종 등은 쉽게 개성공단에 진출할 수 없다. 

개성공단 진출 패션기업 북한변화 이끌어내 북한 상호협력 강조 

따라서 섬유패션 업종은 개성공단에 가장 잘 어울리는 산업이다.현대아산은 앞으로 전개될 개성공단의 원대한 프로젝트를 설명했다.현대아산 옥상에서 바라본 개성공단은 온통 붉은 색 흙으로 파헤쳐져 있었다. 북한 근로자들이 웃통을 벗어 던진 채 일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개성공단의 전경은 남한의 여느 공단과 비슷하다. 아니 어쩌면 남한의 노후된 공단 보다 개성공단이 더 현대화되고 잘 정돈된 모습으로 건설되고 있는듯 했다.현대아산 관계자의 말대로 개성공단이 완공되면 남한의 일류 공단에 버금가는 모습을 갖추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북한 땅에 이렇게 퍼부어서 과연 잘 될까" 누군가 고개를 갸웃하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현대아산이 밝히는 꿈같은 개성공단 프로젝트의 시나리오를 들으면서 눈앞에서 진행되고 있는 광경을 직접목격하게 되자 감탄사를 연발했다. 필자는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에서 나온 두명의 참사와 인사를 나누고 개성공단과 관련된 내용을 중심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한 참사는 63년생이라고 했고 다른 참사는 68년 생이라고 했다. 북한도 6.25 이후 세대인 40대가 주축이 돼 사회 전반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다. 두 명의 참사는 필자와 같은 나이대였지만 얼굴이 많이 타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역시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대를 나온 엘리트계층이였다. 정치적인 선전 구호만 빼면 남북의 이질감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대화가 가능했다.

"남쪽 어데서 왔습네까"
"기자인데요"
"**일보 기잔 아니디요. 남조선 언론은 왜 그렇게 북조선을 까는기야요. 미사일 실험 한 것 하고 개성공단 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네까. 보시라요. 아무일 없잖습네까"

그들과의 짧은 대화에서 미사일 발사와 북핵 문제로 개성공단에서 남쪽이 발을 빼거나 사업 자체가 위축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개성공단은 북한 당국과 주민들이 원하고 있고 남쪽에서 어떤 형태로든 지원과 도움을 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도움(지원)이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정색 했다.

"지원(도움)이 아니디요. 북남이 협력하는 사업이디요"

지원(도움)이냐 협력이냐에서 나는 그들과 대립됐다. 그들은 남한이 전력을 공급해 주고 개성공단에 공장을 세우고 비료와 쌀을 보내주는 것은 지원(도움)이라기 보다는 북한과 협력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북한의 현실을 그런 식으로 방어하지 않으면 무너질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까. 갑자기 남측 안내원의 말이 떠올랐다.

"자존심까지 빼고 나면 그들은 존립할 수 없을 겁니다. 개성 시내를 한번 둘러 보세요. 아니 북한 땅을 직접 한번 보세요. 그들에게 그런 자존심 조차 없다면 무너질 겁니다"
나는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골프장이 생긴다는데 북한에도 골프를 칩니까"
"아 골프요. 자주 칩네다. 골프도 많이 치고 베드민턴도 많이 하고 그럽네다"

그는 북한에서 골프를 칠 만큼 상류층이 아닌데도 골프를 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자존심 때문에 나온 거짓말 이거나 말뜻을 잘 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왜 남한 사람들 마음에 와닿지 않는 그런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지 왜 그런 단어(지원,도움,원조)에 집착하고 있는지 개성 시내를 통과하면서 알 수 있었다.

현대아산을 나온 방문단은 개성시내를 통과해 개성시의 최고 숙박시설로 알려진 자남산여관으로 가 점심식사를 할 예정이였다. 2006년 식사를 한 개성공단내 북한 식당 봉동관은 들리지 않았다. 개성공단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관계자가 나서 버스 5대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막았다.

상층부에서 버스 5대가 개성시내를 통과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할수 없이 방문단은 버스 4대만 들어가기로 하고 방문단을 분산시켜 4대의 버스로 축소시켰다. 북한 당국이 왜 5대의 버스에 난색을 표했는지 알수 없었다. 버스 4대와 5대가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

신원측 관계자는 혹시나 개성시내 통과를 불허하지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2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을 실은 남한 버스 4대가 개성시내를 통과하도록 허가한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맞는 말이였다. 북한 측으로는 신원 방문단에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1년 전 한국섬유산업연합회의 대규모 방문 때도 북측은 개성공단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했었다. 최근 방문한 여러 단체의 방북에서도 개성공단을 벗어나 개성시내를 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한 사례는 많지 않았다. 신원에 큰 특혜를 부여한 것이긴 하지만 북측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음을 나타낸 징후이기도 하다.

개성시내로 접어들자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관계자들의 눈빛이 번떡이며 방문단을 주시했다. 혹시나 카메라로 거리의 전경을 찍지나 않는지 유심히 살피는 듯 했다.

안내원들은 방문단에 사진촬영을 하지 말것을 거듭 강조했다. 개성공단을 빠져 나와 10여분을 달리니 평양으로 향하는 고속도로가 보였다.

개성에서 평양까지 2-3시간 정도면 갈수 있다고 했다. 고속도로의 수준은 남한의 지방국도를 연상 시켰다. 개성시 외각은 한가로운 농촌의 모습이였다. 개성시내가 가까워 지면서 사람들의 모습이 자주 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학생들,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향하는 직장인,보따리 짐을 지고 걸어가는 중년아줌마, 자전거를 타고 가는 중년 아저씨, 교통정리를 위해 거리에 서 있는 교통안전원, 군복을 입은 군인들, 집 주위에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서 있는 어린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차안에서 손을 흔들어 주면 곧바로 손을 흔들며 답장을 보냈다. 거리의 풍경은 한가로운 남한의 작은 농촌 같았다. 중심가로 가면서 아파트단지와 대형 건물들이 보였다. 아파트의 유리창 틀은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진 것 같았고 유리창의 두께도 얇아 보였다.

건물의 외벽은 시멘트로 마감해 우중충한 색깔을 띄었다. 거리에 상점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도심지로 오면서 리발관, 아동복백화점, 상점 등의 글씨가 씌여진 간판들이 간간히 보였다. 붉은 글씨로 씌여진 선전 문구는 여기저기 곳곳에 나붙어 있었다.

개성시내의 전체 분위기는 남한의 70년대를 연상시켰다. 간간히 새련된 옷차림의 젊은 여성이 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달리곤 했다. 아마도 개성공단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짐작 됐다.

개성 도심시에 아스팔트 도로는 있었지만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숨박꼭질이라도 하는 것 처럼 차량들이 숨어버린 것일까. 멀리 주택의 담과 건물 유리창 창틀은 최근 페인트를 칠한 듯한 흔적이 보였다.

안내원은 개성공단 투어를 허가하기 전 북한 당국이 대대적인 단장을 했었다고 귀뜀 해 주었다. 누군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눈에 보이는 북한 실상에 대한 측은한 표현이 담겨 있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북한은 크게 낙후돼 있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낙후된 북한 경제를 개선시킬 수 있는 매개체는 남한의 기업들 밖에 없다. 주위의 한 인사는 북한의 모습을 보니 눈물이 나올 만큼 마음이 아프다고 표현했다.

휴전선을 경계로 불과 1시간 남짓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남쪽의 삶과 북쪽의 삶이 너무 큰 차이로 벌어져 있었다. 자남산 여관까지 가는데 버스는 20여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개성시내 중심부에서 인부들이 모여 삽질을 하며 땅을 파고 있었다.

건물을 지으려는 것 같았다. 옆에는 큰 포크레인이 서 있었다. 순간 놀라움으로 포크레인을 살펴보았다. 현대중공업 포크레인이였다. 개성공단을 건설하기 위해 투입된 중장비 같았다. 거리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차량은 목격되지 않았다.

버스는 자남산 여관에 닿았다. 자남산여관은 북한의 5성급 호텔에 속한다. 현관에 들어서자 김일성의 방문(72년 9월 24일)을 기념한 커다란 유화 그림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계단을 올라 연회장으로 갔다. 연회장은 넓고 밝았다.

연회장 테이블에는 방문단을 위해 준비한 음식이 놓여 있었다. 북한의 5성급 호텔이 제공하는 이날 점심 비용은 남한 기준으로 5만원 정도라고 했다.

개성에서 나는 각종 나물과 떡, 몇가지 해물(오징어, 새우)요리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음료로는 일본에서 수입된 캔쥬스와 북한산 술(백두산 들쭉술, 맥주)이 제공됐다. 호텔 직원들이 추가 음식을 들고 나왔다. 오찬 행사는 짧게 진행됐다.

행사 도중에 여러번 전기가 나가곤 했다. 북한의 전력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호텔 로비에 있는 상점에서 북한산 특상품이 판매됐다. 주로 꿀과 술, 인삼, 농산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가격은 모두 유로화로 표기돼 있었지만 거래는 달러로 이루어졌다. 북한이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특산품 판매에 주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북측 관계자는 상점들은 모두 당에서 관장하고 있고 개인 상점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최근 TV에 방영된 북한 관련 프로에서 평양의 경제 사정이 많이 풍족해 진것 같던데..라고 물었다. 그는 평양은 살기 좋은 도시라고 소개하며 통일이 되면 자신을 찾으라고 말했다.

"통일되면 평양 대동강 강가에서 소주한잔 하시자요"

그러나 그의 말처럼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벽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냉전체제 하에서 가장 큰 벽은 이념이였다. 물론 지금도 남과 북에서 이념의 벽은 큰 장애물이다. 그러나 세계는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와 함께 이념적 경쟁에서 자본주의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제 세계는 경제적 불균형의 벽과 싸우고 있다.

남한과 북한도 이념의 장벽을 남겨둔 채 경제적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일환으로 남북경협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개성공단은 그 과정의 일환이다. 북한에서 대도시에 속하는 개성시의 환경은 남한의 70년대를 연상 시킨다.낙후된 북한의 경제를 남한의 80-90년대 수준으로 끌어 올리지 못한다면 통일을 이룬다 하더라도 남쪽에서 치뤄야 할 희생이 너무 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한의 젊은 세대를 포함한 상당수 사람들은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닐까. 자남산 여관을 나와 방문단은 걸어서 인근에 위치해 있는 선죽교를 둘러 보았다.

고려시대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 숨을 거두었던 역사적 장소 선죽교에 대한 해석은 남한이나 북한이나 비슷했다. 충신을 기리고 그의 정신을 본 받으려는 뜻은 남과 북이 하나였다.

선죽교 다리 앞에는 북한의 젊은 여성안내원들이 가판 매장을 개설해 운영하고 있었다.주로 술과 농산물 기념품 등을 팔았다.

선죽교에서 버스로 10여분을 가니 고려민속박물관이 나왔다. 개성의 최대 민속박물관이였다. 남한의 박물관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조건이였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인 성균관을 그대로 민속박물관으로 만들었다며 북측 안내원은 자연 그대로를 보존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애섰다.

나는 신원 박성철 회장과 고려민속박물관 안으로 걸어 가며 이번 방문의 의미와 성과에 대해 얘기했다.

박 회장은 "이번 방문에 연세가 지긋한 기독교계 목사님들이 많이 참여 하셨는데 이분들이 개성공단과 개성시내를 둘러 보면서 새로운 생각을 많이 했을 것으로 봅니다. 왜 우리가 개성공단에 공장을 설립해야 하는가를 많은 분들이 눈으로 보고 느꼈을 것입니다"며 "앞으로 남한의 더 많은 사람들이 개성을 방문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고려민속박물관을 나와 북한 CIQ까지 가면서 카메라에 담을 수 없는 개성시의 모습을 나는 유심히 지켜 보았다. 개성공단에서 시야를 바깥으로 조금만 돌리면 북한의 진정한 모습이 보인다.

민둥산이 드러나고 개성공단 주변을 둘러산 주택들은 낡은 시멘트 칠을 한 모습으로 서 있다. 여러가지 생활 필수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경제적으로 이미 남과 북의 경쟁은 판가름 났다. 그러나 우리가 북한에 줄 수 있는 것이 경제적으로 우월하다는 자만심은 결코 아니여야 한다. 그런 태도로는 북한의 닫힌 문을 열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이 처한 현실과 상황을 누구보다도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자신들의 모습을 남쪽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들어내기를 그들은 거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남쪽의 대북사업을 놓고 지원(도움)이 아니라 협력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협력이냐 지원이냐를 놓고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것은 남과 북 서로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성공단에 진출한 신원의 사례에서 보듯 그들을 보다 인간적으로 대하고 대등한 위치의 동반자로 여길 때 그들도 마음에 문을 활짝 열게 될 것으로 믿는다.

북한 CIQ에서 수속을 밟고 있는데 그동안 말도 건네지 않은 채 내 뒤를 따라 다녔던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의 한 관계자가 다가와 말을 건냈다.

"기자동무 잘 가시라요. 다음에 또 봅시다래"

다른 이들과 달리 하루종일 무뚝뚝하게 나를 노려 보던 그가 내게 악수을 청하며 환하게 웃었다.(패션저널&텍스타일라이프 조영준 기자 ⓒ세계섬유신문사)

(패션저널&텍스타일라이프 ⓒ okfash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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