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행정, 지리, 교통 중심지, 고양시 지명 발생지, 최영 장군 묘, 벽제관지, 고양향교 등 가볼 곳 많아
[GP NEWS]지난호까지 세계 10대 도시에 뽑힌 고양시의 전체적인 도시 현황과 고양시 3개구에 대한 내용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호부터는 고양시 3개구 내에 소재한 각 동(주민센터)의 연혁과 지역특성, 마을 변천사, 가볼 만한 곳 등을 소개한다. 고양시에서 가장 큰 규모(면적:165.49㎢-시의 61.9%,인구:시의 41%)인 덕양구에는 19개동(동주민센터)이 있는데 먼저 고양시 지명의 발생지인 고양동을 찾아가 본다.(편집자주)
[고양동 전체 개요] 고양동은 고양시 지명의 근원이 되는 역사적 중심마을이다. 오래 전부터 고양동은 고양시의 행정, 지리,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곳을 지나야만 중국과 북부지방을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관서대로, 경의대로, 연행로의 중심지가 바로 이곳에 있다. 특히 고양동의 벽제관지는 매우 중요한 문화유적지로 당시 지금의 1번 도로와 함께 한 가장 중요한 영빈관 역할을 했다. 지금도 이 지역은 파주, 고양, 양주, 의정부, 서울이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 꼽힌다. [고양동 지명유래] 고양동 명칭은 조선 인조 때부터 1914년까지 고양군청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군청 자리는 현재 백제빌라 옆 테니스장 부근이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중심지인 이유로 이곳에 당시 학교인 향교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이곳을 읍내라 부른다. 현재 고양동에는 법정동으로 고양, 선유, 벽제, 대자동 일부가 포함돼 있다. 이중 선유동은 경치가 좋고 살기 좋아 신선이 논다는 의미에서 선유(仙遊)가 되었고 대자동은 세조의 아들이며 세종의 아우인 성녕대군이 돌아가자 큰 자비를 내린다는 의미에서 대자사를 짓게 해 대자(大慈)를 사용하고 있다. 벽제(碧蹄)는 푸르고 맑으며 골이 좁고 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지역특성, 변천사,명소] 고양동은 동주민센터가 있는 도시화된 고양동 마을과 선유동이라는 농촌 마을, 대자동 일부의 농촌마을 도시와 농촌이 함께 있는 벽제동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고양동에는 초등학교와 상가, 기관이 몰려 있고 파주, 양주, 서울, 원당 ,의정부 등으로 이어지는 덕양대로가 지나간다. 선유동은 조용한 전원마을로 장미 등 화훼산업이 발달돼 있으며 대자동은 문화재가 많고 통일로가 지나고 있어 교통량이 많은 마을이다. 벽제동은 파주와의 경계에 자리한 마을로 일부에는 빌라가 들어서 있고 최근에는 대형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고양동의 가볼 만한 곳] 고양동 명소로는 사적으로 지정돼 있는 벽제관지, 고양향교를 비롯해 중남미문화원(박물관), 최영장군 묘,연산군 금표비 등의 문화재와 명소가 있다. 이외에도 고양동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산으로는 개명산, 우암산, 장령산, 대자산이 있고 고개로는 목암고개, 혜음령, 퇴패고개 목암고개 등이 있다.
■ 최영장군 묘 (경기기념물 23호) 대자산 기슭에 최영 장군의 묘가 있다. 최영 장군은 고려시대 장군으로 여러 차례 왜구를 물리쳐 공을 세웠다. 최영 장군은 고려를 지키려는 마지막 장군으로 일생 동안 80여 회의 전투에서 항상 승리한 명장이었고 강직하고 용맹하고 청렴결백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 연산군 금표비
문화재자료 제88호인 연산군금표비(燕山君禁標碑)는 연산군 10년(조선 1504년) 만드어진 것으로 덕양구 대자동 산10-2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연산군의 유흥지인 고양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세운 금표비로 무단으로 들어올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연산군 시대 금표비는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금천군 이변의 묘역 안에 세워져 있는데 1995년 묘역 보수 작업 중 묘역 앞에서 출토됐다. 비의 크기는 높이 1.38m 폭 0.54m 두께 22.5cm이다. 이 비석은 금석문으로 희귀한 예일 뿐만 아니라 문헌의 사실을 고증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 벽제관지 사적 제144호인 벽제관지[碧蹄館址]는 조선시대 경기도 고양시 벽제(현 高陽洞)에 있었던 역관(驛館)인 벽제관의 터(면적 4,175 ㎡)다. 주로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절이 숙박·휴식을 하던 곳이다. 국왕이 제릉(齊陵) 친제(親祭) 때 숙소로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중국에서 오는 사절들도 휴식하는 공용 숙박시설이었다. 1960년까지 객관문(客館門)은 남아 있었으나 퇴락해 무너져버리고, 지금은 역사(驛舍)의 윤곽과 터만 남아 있다.
■ 고양향교 고양향교(高陽鄕校)는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高陽洞)에 있는 조선시대 향교이다. 1985년 9월 10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69호로 지정됐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의 제례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고양향교는 조선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때 처음 지었으며,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는다. 향교의 대성전(大成殿)과 동무·서무, 내삼문(內三門) 등은 조선 말기의 건축수법을 나타내는데, 여러 차례 보수를 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향교에서는 해마다 고양 유림이 주관해 공자를 제사 지내는 석전대제를 봉행한다.
6·25전쟁 때 불에 탄 명륜당(明倫堂)·전사청(典祀廳)·외삼문(外三門) 등은 1984년에 새로 지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앞쪽에 강학 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있고,뒤쪽에는 제향 공간으로 대성전과 동무·서무, 전사청이 있다.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단청이 칠해져 있고 방풍판이 설치돼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하던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명륜당의 좌우에 있는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머물며 공부를 하던 곳이다. ■ 중남미문화원 중남미문화원은 중남미 4개국에서 30년간 외교관 생활을 해온 이복형대사 부부(원장)가 수집한 유물로 4천 여점이 전시돼 있는 박물관이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 유일의 중남미 관련 박물관으로 홍갑표 이사장이 설립했다. 고대 인디오들의 문화유산과 생활상을 한눈에 볼수 있다.
제2회 고양 건축문화대상을 받았으며 마야·잉카·아즈텍 문명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5,000평의 대지에 박물관, 미술관, 야외전시장, 휴게소, 기념품점, 강의실(100석), 영상시설이 구비돼 있다. 박물관에는 토기관, 석기관, 목기관, 가면관, 민속공예관, 생활관의 6개 주제별 전시실이 있다.
■ 은행나무 벽제관지에서 향교방향으로 새로 난 길을 따라 가면 사거리 오른쪽에 500년 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있다. 높이가 24m, 둘레가 7.6m나 되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고양군의 어느 원님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처음 심었을 때는 암수 한쌍을 심었는데 성장을 거듭하면서 한그루로 합쳐져 자라고 있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개갑수'라고도 불리는데 임진왜란 때 일본 장수가 명나라에게 크게 이긴 기쁨에 갑옷을 벗어 이 나무에 걸쳤다고 해 '괘갑수'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낮추어 '개갑수'라고 불렀다고 전해진다.
■ 개명산 벽제동 산1-1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개명산은 해발 621.8m이며, 백두대간 줄기답게 온갖 나무와 들꽃이 밀생하고, 오목눈이 딱새며 흑두루미, 도롱뇽 버들치가 사는 고양의 명산이다.
■ 고양동 연혁 고구려조 : 개백현, 달을성현 신 라 조 : 고봉현, 우왕현, 왕봉현 고 려 조 : 고봉, 행주(덕양) 1413년 : 조선조 태종 13년 고양현 1471년 : 조선조 성종 2년 고양군 1936년 2월 14일 : 연희, 한지, 용강면, 경성부로 편입 1949년 8월 15일 : 은평, 숭인, 뚝도면이 서울시로 편입 1961년 8월 7일 : 을지로 6가에서 고양시 주교동으로 청사 이전 1973년 7월 1일 : 신도면의 구파발리, 진관내리, 진관외리 서울시 편입 1992년 2월 1일 : 고양군이 고양시로 승격(고양동사무소 신설) 1996년 3월 1일 : 덕양구, 일산구 신설 2004년 6월 : 2개구 37개동에 시민 87만여명 거주(자료참조:고양동주민센터 홈페이지) (조영준 고양의정소식지 편집위원)